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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HYO)칼럼

제목 [ 0060 ] 효의 관점에서 본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
작성자 김종두
작성일자 2022-12-05





효의 관점에서 본 다산천주교의 관계

 

김종두(한효총 사무총장,전 국방대/경민대/성산효대학원 교수) 



 다산은 자신과 천주교와의 관련성에 대해 변방사동부승지소자찬묘지명에서 밝혔다. 내용인 즉 다산이 천주교를 믿은 기간은 23세에서 30세까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을 평생 동안 천주교 신자였다고 잘못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산이 천주교와 인연이 된 것은 큰형수(약현의 처)의 동생인 이벽(李檗,1754 ~1785), 그리고 성호학파로 분류되는 권철신(權哲身,1736~1801)과 이가환(李家煥,1742~1801) 등이 중심이 된 보유론(補儒論) 관점의 강학회(講學會)였다. 강학회는 오늘날로 설명하면 일종의 학회 활동이다. 이벽은 한국 천주교 창설의 주역인 인물이다. 그가 천주교 창설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6대조 이경상(李慶相,1602~1647)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인질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8년간 보필하면서 모아 가져왔던 천주교 서적을 통해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근래 필자는 다산시민대학을 진행하면서 다산은 평생 천주교 신자였고, 신부였다는데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다산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맞지만 평생 신자였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23세 때 큰형수의 4주기 제사를 마치고 이벽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천주교에 관한 설명과 천주실의를 받아 보고 한때 심취했지만 30세 때 진산(珍山)사건을 계기로 절의(絶義)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산이 평생 동안 천주교 신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다산선생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다산이 직접 저술한 내용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거짓으로 보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입니다.”라고 설명해준 바 있다.

 

다산은 실사구시적 효()를 중시한 실학자다. 이는 압해정씨가승원덕, 원교, 자찬묘지명, 그리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에도 다산은 평생 동안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은 맞지 않다. 이를 효의 관점에서 뒷받침 해 본다.

 

첫째, 다산은 부모에 대한 효심 때문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는 점이다. 효제자(孝弟慈)를 학문의 기초로 삼았던 다산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당시 이벽과 이승훈(李承薰,1756~1801) 등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종친회에 불려가 야단을 맞는 등 천주교를 믿는 것은 큰 불효로 인식되던 때였다. 이벽과 이승훈 등이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아왔던 다산으로서는 그 역시 불효를 할 수 없었다. 예기가장 큰 효는 부모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大孝尊親 其次不辱).”라고 했다.





둘째, 다산은 정조의 특별한 지우를 받은 터라 임금과의 신의(信義)를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정조와 다산은 효를 중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효는 의()와 덕()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다산으로서는 정조에 대한 신의가 중요했다. 다산은 정조에게 제출한 변방사동부승지소에서 신의 경우, 당초 서양의 사설에 발을 들인 것은 호기심 많은 아이의 장난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차츰 식견이 자라면서 사설에 대해 조금 알게 되자 곧바로 원수처럼 여겼고, 분명히 알고 난 뒤에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으며, 뒤늦게 깨닫고 나서는 더욱더 심하게 미워하였습니다.”라고 밝혔다.




셋째, 철저한 유학자로서 불효적 행위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다산은 상례(喪禮)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뿐 아니라 그의 유명(遺命)으로 상의절요에 따라 철저하게 유교 방식으로 장례가 치러진 점도 그렇다. 소학부모가 사랑하시는 바를 또한 사랑하고, 부모가 공경하시는 바를 또한 공경해야 한다父母之所愛 亦愛之 父母之所敬 亦敬之.”고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심(良心)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자꾸 당신은 천주교인이다.”라고 프레임을 씌우면, 이미 망자(亡者)된 다산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산은 제사와 절하기 등 유교적 효에 배치되는 것을 제외하면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박애사상, 과학사상 등은 다산이 바라던 바였다.





다산이 지은 압해정씨가승에는, 아버지 정재원(丁載遠,1730~1792) 공이 생원시 에서 영조에게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 숙종(肅宗) 제사를 얼마 앞둔 시점에 재원 공과 대화하던 영조가 그의 깊은 효심에 감탄했다는 내용이다. 중용무릇 효라는 것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여 세상에 펼쳐나가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효심이 강한 가문에서 성장했고, 다산학의 기반을 효제자(孝弟慈)에 두고 있던 다산으로서는 불효의 종교로 인식되는 천주교를 절의(絶義)했다고 밝히고 나서, 30세 이후에 다시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다산이 평생 동안 천주교 신자였다는 내용은 옳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