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처럼

오산(吳山, 이음플러스심리상담센터장, 시루작은도서관장)

어려서 큰댁에 가면 건넌방 한 귀퉁이에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쳇다리 위에 앉아 있는 항아리 시루가 있었다. 쳇다리 아래 물받이 통에는 바가지가 둥둥 떠 있고 호기심에 물을 부으면 이내 물은 흘러내린다. 퍼부으면 퍼부은 대로 그 자리에서 물은 모두 아래로 빠져버린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콩나물시루는 밑 빠진 독이라 물 한 방울 고이는 법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자기 속 콩은 어느새 샛노란 콩나물로 자란다. 물이 모두 흘러내린 줄만 알았는데 시루 속 콩은 흘러내리는 물을 머금고 자라는 것이다. 물이 그냥 흘러 버린다고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다. 스치는 인연에도 서로 의지하고 성장하는 시루 속 콩나물처럼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일, 즉 교육과 상담이 어쩌면 처음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청소년 상담을 하다보면,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매번 내담자를 만날 때마다 내가 제대로 상담하고 있나!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인가!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지루하고 답답한 순간을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응답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떠한 상담기법이나 기술을 앞세우기보다 내담자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전보다 조금은 더 나아진 내담자를 만나게 된다. 상담자로 옆에서 시루처럼 비계(飛階, scaffolding)의 역할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교육현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배울 때마다 모르겠다던 학습자가 ‘아하’하고 스스로 깨우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비계(飛階, scaffolding)는 초보자나 아동이 주어진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유능한 성인이나 또래가 도움을 주는 지원의 기준이나 수준을 말한다. 심리학자 비고츠키(Vy-gotsky)는 아동의 인지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아동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성인이나 교사의 조언 또는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도움을 주는 성인이나 교사는 아동의 수준에 맞도록 도움의 수준이나 양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지도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초보자나 아동이 스스로 새로운 인지구조를 발달하게 하는 조절방안을 비계작업(scaffolding)이라고 한다.

콩나물을 키우는 시루는 이러한 비계(飛階)와 유사한 점이 있다. 시루는 밑 빠진 독의 구조이지만 콩나물이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상담자와 교육자는 내담자와 학습자에게 이러한 안전한 성장공간, 시루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효(HYO, Harmony of Young & Old)는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조화를 말한다. 효는 비고츠키의 비계(scaffolding)처럼 앞선 사람과 뒤선 사람, 교육자와 학습자 간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조절 공간이다. 게다가 그 방향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 더 긍정적이다. 젊은이와 노인이,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처럼 상생적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성장하는 공간, 콩나물시루처럼 스치는 인연을 허투루 하지 않고 함께 성장하는 열린 공간이 효(HYO, Harmony of Young & Old)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